본문영역

  • 옻칠로 비우고, 나전으로 채우다

    대한민국 나전칠기 제1호 명장 손대현 장인

    • 글. 강진우 편집팀 — 사진. 김현민 — 작품 사진제공. 수곡공방
  • 원목의 가구에 시간과 노력을 갈아 켜켜이 옻칠을 올리고, 총천연색의 전복과 소라 껍데기를 세공해 얹는다.
    빨려들 듯 검고 깊은 옻칠 바탕에 새겨진 나전 문양은 그곳에 있음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다.
    손대현 장인의 지난 60여 년이 빚어낸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다.
손대현 장인 사진
60년 세월을 거쳐 명장 반열에 오르다

나전은 전복과 소라의 겉껍데기를 갈고 원하는 문양대로 잘라 칠의 표면에 붙이는 공예 기법이다. 한편 칠기는 어떤 형태의 물건에 옻칠을 켜켜이 입힌 물건을 뜻한다. 예로부터 중국은 조칠기법(옻칠을 두껍게 올려 조각하여 마감)에 강했고, 일본은 옻칠에 일가견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둘을 융합해 나전칠기라는 고유하고 매혹적인 문화유산을 탄생시켰다.
그간 수많은 사람을 홀려 온 나전칠기는 열다섯 살의 한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손대현이었다. 심부름꾼으로 일하던 회사와 같은 건물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작업자들이 자개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담고 있었다. 소년 손대현은 그 영롱함과 마주하자마자 나전칠기에 매혹돼 그 분야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그 작업장은 합성 도료인 캐슈로 칠을 하고 있었는데요. 이왕이면 우리나라의 ‘진짜 옻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조선 시대의 마지막 나전칠기 장인 전성규 선생을 사사한 저의 스승 민종태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이후 스승님과 함께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스승님이 전성규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호 ‘수곡’을 이어받아 3대 수곡으로서 전통 기법의 나전칠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1964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나전칠기에만 매달리다 보니 어느새 옻칠의 대가가 됐다. 1991년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 제1호 선정, 1999년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1호 옻칠장 인정 등이 이를 방증한다. 그가 1986년 만든 나전칠기 작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됐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유럽 7개국을 순방할 때 상대 국가 원수에게 선물할 나비당초문 서류함을 만들었다.
일본의 일왕,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도 그의 작품을 앞에 두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세계적 자동차 기업 BMW의 의뢰로 자동차 내장을 나전칠기로 꾸민 ‘나전칠기 BMW750Li’를 2011년 서울모터쇼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나전칠기의 매력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순간순간에 그의 작품이 자리해 있었다.

1. 나전칠 모란당초무늬 이층장
2. 나비당초문건칠 호리병
3. 팔각 모란문 과기
4. 모란당초문이층장

손대현 장인은 “공간을 채우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면 안 된다”고 말한다.
채우는 행위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야 전체적인 작품을 조화롭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전 작업을 할 때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여기에 위배되는 오브제는 과감하게 변화를 주거나 빼버린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천년의 아름다움에 담긴 장인 정신

나전칠기는 ‘천년의 예술’이다. 제대로 만들어낸 나전칠기는 부서지거나 뒤틀리지 않고, 원형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한다. 12세기 고려조에 만들어진 작품이 미국의 한 미술관에서 여전히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옻액 특유의 성분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성스러운 칠 기법이 변치 않는 매력으로 승화한 것이다.
나전칠기의 제작 과정은 그야말로 지난하다. 먼저 나전칠기의 밑바탕이 되는 옻칠을 해야 하는데, 원목 상태의 기물이나 가구인 ‘백골’에 옻액이 잘 흡수되도록 생칠을 묽게 배합해 골고루 바르고 사흘 정도를 말린다. 그 위에 목재가 뒤틀리지 않도록 삼베를 붙이는데, 찹쌀풀과 생칠을 섞은 천연 접착제 호칠로 발라준다.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도 쓰였을 만큼 접착력이 강하며, 덕분에 백골과 삼베의 결속력이 매우 강해진다.

“여기에서 끝나면 좋겠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까칠한 베 표면을 사포로 밀어 다듬은 다음, 생칠을 하고 그 위에 옻액과 고운 황토를 섞은 토회를 바른 뒤, 마르면 또 한 번 얇게 토회를 바르고 숫돌로 표면을 곱게 갈아 냅니다. 이후, 표면의 미세한 구멍을 토회로 메운 뒤 정제한 옻을 바릅니다. 이를 ‘초칠’이라고 하는데요. 칠한 면이 마르면 숫돌로 또다시 표면을 고른 뒤 ‘중칠’을 하고, 숯가루를 사용해 중칠 표면을 곱게 갈아 낸 뒤 마지막으로 ‘상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상칠 표면을 백일홍 혹은 상추나무로 만든 숯으로 고른 뒤에야 비로소 옻칠 작업이 끝납니다.”

만약 순수하게 옻칠만 한 칠기가 아니라 자개를 더한 나전칠기를 만들고 싶다면, 초칠에 들어가기 전 모양대로 자른 자개를 일일이 아교로 붙이고, 그 위에 생칠을 발라 접착력을 높인 뒤 자개 두께만큼 황토를 입히고 표면을 갈아 낸다. 이후 중칠, 상칠의 과정이 더해진다. 꼬박 두세 달이 걸리는 과정이다. 왜 이렇게까지 한 작품에 엄청난 공을 들이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보존성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나무는 수분을 머금으면 뒤틀리고 취약한데요. 이렇게 겹겹이, 공들여 옻칠을 하면 방충, 방습 성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목재 특유의 뒤틀림도 막을 수 있죠. 칠 과정을 하나라도 생략하거나 대강 넘기면 언젠가는 하자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옻칠을 채우고 비우는 과정을 오래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5. 2011 서울모터쇼에서 공개된 손대현 장인의 나전칠기 장식을 적용한 BMW 750Li
나전칠기와 꼭 닮은 인생 궤적

나전칠기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영롱한 빛깔로 사람들을 홀린다. 하지만 무조건 나전을 많이 쓴다고 해서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채워지는 건 아니다. 같은 문양이 반복되는 당초문이라도 줄기와 잎의 배치, 꽃의 위치 등에 따라 눈이 피로할 수도, 편안할 수도 있다. 이를 면밀하게 살피지 않고 무작정 채우다 보면 아무리 공을 들였더라도 졸작으로 전락하고 만다.

“공간을 채우는 행위 자체에 의의를 두면 안 됩니다. 채우는 것 하나하나에 그럴 만한 의미를 부여해야 전체적으로 작품을 바라볼 때 조화로움이 유지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나전 작업을 진행할 때 질서와 자연스러움을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여기에 위배되는 오브제는 과감하게 변화를 주거나 빼버립니다.”

나전이 채움이라면, 옻칠은 비움이다. 옻칠은 나전의 밑바탕인 동시에, 나전의 빛깔을 더욱 부각할 수 있도록 돕는 든든한 조력자다. 하지만 나전에서 조금만 시선을 돌려 보면, 까맣게 비워져 있는 옻칠에 깊이 있는 매력이 녹아들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나전이 새겨져 있지 않은 옻칠 부분은 여백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상상력의 원천이 됩니다. 예를 들어 ‘십장생운학문이층장’을 보면, 십장생이 섬에 떠 있고 학이 그 위를 날아가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옻칠한 까만 부분의 아래쪽은 바다가 될 수 있고, 학이 날아가는 위쪽은 하늘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수평선이 펼쳐져 있겠죠. 이렇듯 옻칠은 그 자체로 비움인 동시에,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의해 채움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나전칠기에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얼마 전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다. 올 12월에 나전칠기를 선보이는 기획 전시를 준비 중인데, 작품을 구매해 전시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기꺼이 네 점을 제작해 배에 실어 보냈다. 나전칠기에 깃든 비움과 채움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또 한 번의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통해 나전칠기에 대한 관심을 채우고 낯섦을 비우고 있는 손대현 장인. 그는 나전칠기를 꼭 닮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6. 손대현 장인의 작업 도구
① 귀얄: 풀이나 옻을 칠할 때에 쓰는 솔의 하나로, 털의 종류는 주로 여성의 머리카락이나 말총 등을 사용하며 이를 넓적하게 묶어 만든다.
② 숫돌: 옻칠 작업 과정 중 표면을 갈아 낼 때 쓰는 도구로, 표면적이 다른 여러 종류의 숫돌을 상황에 맞게 번갈아 사용한다.
③ 주걱: 백골 상태의 기물 위에 삼베 등을 펴 바를 때 사용하며, 이 또한 상황에 맞춰 여러 크기의 주걱을 번갈아 쓴다.
④ 칼: 옻칠 아래에 덮여 있는 자개의 모양을 드러내기 위해, 옻칠 표면을 세밀하게 긁어 낼 때 사용하는 도구다.